예쁜 그림은 넘치고, 아름다움은 부족하다

한 일러스트레이터는 일본의 수채화가 도요나가 료헤이의 연작을 소개하며 이렇게 썼다. AI 시대에 인간이 만든 진짜 예술을 보는 일은 숨이 막힐 만큼 아름답다고. 이어 AI는 훔친 것을 되뱉을 뿐이며, 고된 연습을 통해 무언가를 창조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그런 결과물은 입안에 남은 재처럼 아무 의미도 없다고도 했다. 한 게시물 안에 인간의 예술을 향한 감탄과 AI에 대한 거부감이 나란히 놓였다.

도요나가는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곳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작업은 일상과 자연의 한 장면을 투명수채로 옮긴 것이다.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완성도 높은 화면만이 아니었다. 오랜 연습이 쌓인 손의 흔적과 수많은 장면 가운데 무엇을 바라볼지 선택한 작가의 시선까지, 모두 작품의 일부였다.

게시물은 작가 공동체를 향한 애정을 담아 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끝난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보다 넓은 의미를 지닌다. AI 에이전트가 그림과 글, 초고까지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시대에 ‘예쁘다’는 감정은 화면을 보는 즉시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감정은 다르다. 누가, 무엇을 보고, 어떤 시간을 들여 만들었는지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아름다움은 작품의 외형뿐 아니라 제작자와 과정, 그리고 우리가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이름표 하나가 값을 바꾼다

2023년 한 인지과학 연구에서는 AI가 만든 그림 30점에 ‘인간 제작’ 또는 ‘AI 제작’이라는 이름표를 무작위로 붙였다. 참가자들은 같은 AI 그림이라도 ‘인간 제작’이라고 표시된 작품을 더 좋아했다. 아름다움과 깊이, 가치도 더 높게 평가했으며, 특히 깊이와 가치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AI도 보기 좋은 그림을 만들 수는 있지만, 작품의 의미와 가치는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여긴 것이다.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AI 제작’이라는 표시가 붙은 작품은 인간이 만든 작품보다 화폐 가치가 약 62% 낮게 평가됐다. 흥미롭게도 인간 작품의 가격 프리미엄은 AI 작품과 함께 제시됐을 때만 커졌다. 인간 작품끼리 비교할 때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작품의 픽셀은 그대로였지만, 제작자에 관한 정보와 비교 대상이 가격을 바꾼 것이다.

진짜 손그림이 가짜 취급당할 때

문제는 제작자를 먼저 따지는 습관이 오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2026년 8월,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현대미술관 워커 아트센터의 관객들은 나이지리아계 미국 작가 올라레칸 제이푸스의 디지털 렌더링 작품을 생성형 AI로 만든 저품질 콘텐츠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술관과 작가는 생성형 AI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가는 이미 20년 넘게 자신의 제작 방식을 설명해 왔다. 초기 AI 이미지가 공상과학과 세계 구축이라는 기존 디지털 미술의 문법을 차용하면서, 오히려 원래 있던 디지털 작품이 AI 작업으로 의심받게 된 것이다.

출처를 밝히지 않은 DALL, E 2 비교 실험에서는 참가자들이 AI 그림을 더 자주 선택했다. 또 다른 참가자들은 어느 작품이 AI가 만든 것인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정확하게 구별했다. 사람들은 AI 특유의 특징을 알아보면서도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AI 제작’이라는 이름표가 붙으면 평가는 낮아졌다.

결국 ‘누가 만들었는가’는 작품에 고정된 성질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작품을 다르게 보고, 느끼고, 평가하게 만드는 정보다.


24시간과 4시간의 차이

사람들은 작품에 들인 수고를 품질을 가늠하는 손쉬운 기준으로 삼는다. 2004년 ‘노력 휴리스틱’(들인 노력이 클수록 결과물의 품질도 높다고 짐작하는 심리)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똑같은 추상화라도 제작에 24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을 때, 4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을 때보다 더 호감이 가고 품질이 높으며 경제적 가치도 크다고 평가했다. 눈앞의 결과물은 같았지만, 제작에 들인 시간이 평가를 바꾼 것이다.

앞서 살펴본 제작자 표기 연구의 두 번째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은 인간이 만들었다고 표시된 작품과 많은 수고가 들었다고 느낀 작품을 더 좋아하고 아름답게 평가했다. AI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작품도 관객이 그 안에서 풍부한 이야기를 떠올릴수록 평가가 어느 정도 회복됐다. 수고와 서사는 시각적 호감과 따로 작용하는 부가 정보가 아니라, 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각적 판단 자체에 스며든다.

따라서 AI가 기존 작품을 ‘훔쳐서 토해낸다’는 비판과 인간이 ‘고된 연습으로 창작 능력을 얻는다’는 주장의 대립은 저작권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는 작품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제작 과정과 이력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북아일랜드의 한 창작자는 AI 결과물이 단순한 반복에 불과하며 영혼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ChatGPT로 만든 포스터나 메뉴보다 포스트잇에 서툴게 그린 손그림이 더 낫다고 말했다.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제작자가 직접 감수한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서 더 큰 진정성과 가치를 발견한 것이다.


이미지 너머의 사람을 본다

미적 판단은 결국 무엇을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느낌에는 제작자가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에 대한 믿음이 이미 섞여 있다.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AI 그림이 오히려 더 큰 감각적 호감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같은 그림에 AI가 만들었다는 표시를 붙이면 사람들은 깊이와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지불할 가격은 그보다 더 크게 낮춘다.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제작 정보를 알고 난 뒤의 느낌은 같지 않다.

그렇다고 제작자나 노력만으로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도 없다. 제작자에만 주목하면 오랜 시간 연마한 디지털 작업마저 저품질 AI 이미지로 오인할 수 있다. 들인 노력만 중시하면 서툰 결과물까지 아름답다고 인정해야 한다. 어느 하나도 충분한 기준이 되지 못한다. 화면을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감각적 호감이 앞서지만, 작품을 둘러싼 논쟁에서는 제작자의 정체가 부각된다. 작품의 가치와 신뢰를 판단할 때는 그 뒤에 축적된 연습과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아름다움은 이 요소들이 겹치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수채화를 보며 느낀 감탄도 단순한 성능 비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감탄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오래 연습하고 수없이 선택해 온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다. 화면 맞은편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믿었기에, 눈앞의 아름다움 또한 다르게 다가왔다.

보기 좋다는 이유만으로는 입안에 남는 재 같은 씁쓸함을 피할 수 없다. 제작자와 과정, 감각이 겹쳐지고 이미지 너머의 사람까지 느껴질 때, 힘겹게 쌓은 연습은 작품의 일부가 된다. 그 믿음이 사라진 뒤에도 보기 좋은 화면은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출처


#AI 글쓰기#진정성#창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