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이긴 사건 뒤에 숨은 인간의 설계
이긴 사실만으로 충분할까? 2026년 8월 12일 호주 공정근로위원회는 변호사 없이 사건을 낸 맥쿼리대 컴퓨터과학 강사 그레고리 베이커를 시간제 정규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베이커는 2023년부터 2025년까지 학기 단위 강사로 일해 왔다. 2024년 도입된 고용 형태 전환 제도에 따라 업무가 비정규 고용 요건을 더는 충족하지 않는다고 대학에 통지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분쟁을 제기했다. 그는 AI의 도움으로 대학의 법률 대리인을 상대로 이겼고, 이 사건은 법률 서비스의 대안이 생긴 사례로 소개됐다. 그러나 핵심은 승소 그 자체가 아니었다.
베이커는 이를 위해 질문 입력 외에 AI의 작업 절차도 직접 구성했다. 이메일과 면담 기록을 비롯한 사건 자료를 넣고 월 280달러를 들여 여러 유료 모델에 판례 분석, 상대 주장 예측, 반론 작성을 나눠 맡겼다. AI가 작성한 결과를 다시 검사하도록 작업 규칙도 설정했다. 이렇게 구성한 시스템은 수백 건의 심판 결정을 검토하고 대학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찾아냈다. 이 절차는 IT 전문가로 일해 온 베이커의 기술적 숙련에 의존한 셈이다.
매끄러운 서면 뒤에 숨은 존재하지 않는 판례
같은 도구를 쥐면 결과도 같아질까? 법률 AI를 사용할 기회가 결과까지 고르게 만들지는 않는다. HEC파리의 법률 연구자 다미앵 샤를로탱은 법원이 AI로 만든 가짜 판례나 인용문을 확인한 사건을 공개 데이터베이스에 모은다. 사례 수는 2025년 중반 약 200건에서 2026년 7월 2일 1,668건으로 늘었다. 자력 소송인이 제출한 사례는 975건으로, 변호사가 낸 653건보다 많았다. 법률 지식과 검증 수단이 부족한 이용자일수록 AI가 만든 문장을 실제 판례와 법리로 받아들일 위험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2026년 7월 플로리다 항소법원은 존재하지 않는 판례와 조작된 인용문이 담긴 준비서면을 낸 자력 소송인에게 앞으로 해당 법원에 직접 서면을 내지 못하게 할지 심리했다. 재판부는 비슷한 서면이 플로리다 항소심에서 늘면서 판례와 인용문을 확인하는 데 사법 자원이 쓰인다고 설명했다. 문장이 매끄러워도 인용한 사건이 존재하지 않거나 판결문에 없는 문구가 섞일 수 있다. AI의 답을 그대로 제출한 사람은 제재를 받는다. 베이커는 AI 출력의 원문 대조 절차를 만들었고, 해당 자력 소송인은 이를 하지 않았다. 같은 도구라도 검증이 승패를 가른 셈이다.
법률의 문은 넓어졌지만, 자격은 더 좁아졌다
앞의 사례가 공통으로 보여주는 의미는 분명하다. AI는 변호사 비용이라는 장벽을 낮췄지만 검증 능력을 새로운 이용 조건으로 만들었다. 법률 조력 없이 소송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사람도 이제 완성도 높아 보이는 서면을 만들 수 있으나, 오류가 섞이면 벌금이나 제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문서를 작성할 기회가 늘어도 판례 검색, 원문 대조, 오류 판별에 필요한 능력까지 함께 주어지지는 않는다. 무료 챗봇에 접속하는 일과 법정에 낼 만한 결과를 얻는 일 사이에는 별도의 비용과 숙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검증 부담을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는 기술도 시험되고 있다.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2026년 5월 공개한 실험에서 검색 기능을 갖춘 검사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 판례를 100% 찾아냈고 사건명 불일치도 97.1% 검출했다. 법원이나 법률 AI가 제출 전에 인용을 자동 확인하도록 설계하면 숙련자가 수작업으로 하던 대조 절차를 기본 기능으로 제공할 수 있다. 베이커의 승소는 이용자가 변호사의 검증 업무까지 수행할 수 있을 때 AI가 법률 서비스를 대신한 사례다. 문이 넓어져도 자격은 오히려 좁아진다. 그 부담이 개인에게 남아 있는 동안 법률 AI의 혜택도 숙련자에게만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