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남았지만 독자는 사라지고 있다

글자를 못 읽는 사회와 긴 글을 읽지 않는 사회는 다르다. 미국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문맹의 귀환보다 독서 습관의 약화에 가깝다. 2022년 미국 성인 가운데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절반에 못 미쳤고, 하루 중 즐거움을 위해 글을 읽는 사람의 비율은 2004년 28%에서 2023년 16%로 줄었다. 감소세는 나이와 성별, 학력을 가리지 않았다. 디 애틀랜틱은 글자를 해독하면서도 텍스트가 지식과 문화를 전달하는 주된 매체가 아닌 상태‘포스트리터러시’, 곧 읽기 이후의 사회로 설명했다.

그런데 책의 공급은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지난 10년간 종이책 판매는 늘었고 새 서점도 계속 문을 열었다. 책을 사고 꾸준히 읽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독서량은 일부 독자에게 몰렸다. 읽는 사람의 수는 줄고 남은 독자는 더 많이 읽는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도서관과 서점이 남아 있어도 긴 논지를 따라가며 근거를 비교하는 행위가 다수의 생활에서 빠지면, 독서는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습관에서 소수의 취미로 바뀐다.


잘 쓴 문장이라는 감각은 누구를 속이는가?

독서 습관이 약해지면 글을 평가하는 기준도 줄어든다. 논지가 성립하는지, 근거가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긴 글을 읽고 비교해 본 경험이 필요하다. 반면 문장이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즉시 얻을 수 있으며 생성형 AI는 이 평가 기준에서 강하다. 내용을 검토할 경험이 부족할수록 매끄러운 문체가 신뢰의 근거를 대신한다.

그렇다면 글을 오래 다룬 전문가조차 문장의 표면만으로 작성 주체를 가려낼 수 있을까? 2025년 공개된 실험에서는 문예창작 석사과정 학생과 AI가 유명 작가 50명의 문체로 최대 450단어의 글을 썼다. 미국 상위권 문예창작 과정 출신 28명을 포함한 평가자들은 누가 작성했는지 모른 채 두 글을 비교했다. 일반 지시만 받은 AI는 전문가에게 낮은 평가를 받았지만 작가별 전작으로 미세조정한 AI는 달랐다.

한 사람이 똑같이 매끈한 달걀 두 개를 돋보기로 들여다봐도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문체 충실도에서 AI를 선택할 승산은 인간 글보다 8.16배였고 완성도에서도 1.87배였다. 미세조정된 AI 글은 탐지기에서 97%가 사람 글로 분류됐다.

글을 오래 다룬 독자도 문장의 표면만으로 작성 주체를 안정적으로 가려내지 못한 셈이다.


누가 썼는가 vs. 무엇이 옳은가

문제는 작성 주체에만 있지 않다. 와튼스쿨 연구진은 1,372명에게 함정이 포함된 추론 문제를 풀게 하면서 원하면 AI의 답을 보도록 했다. 기준 조건과 비교한 정답률 차이는 AI가 맞았을 때 +25%, 틀렸을 때 -15%였다. AI를 이용한 참가자들은 잘못된 답도 높은 비율로 따랐고 자신감까지 높아졌다. 연구진은 AI의 출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채택하는 행동을 ‘인지적 항복’이라고 불렀다.

갈림길에서 여러 사람이 각자 확인하지 않고 앞사람의 발자국만 그대로 밟아 따라간다

읽기와 쓰기는 바로 그 검토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었다. 쓰는 사람은 문장이 앞뒤로 성립하는지 확인하면서 생각을 정리한다. 읽는 사람은 타인의 논지를 끝까지 따라간 뒤 근거와 결론의 관계를 판단한다. 둘 다 시간이 들며, 이 과정에서 익힌 비교와 의심은 다음 글을 평가하는 자원이 된다. 그러나 AI에 작성을 맡기면 작업 시간과 함께 판단을 연습할 기회도 줄어든다.

읽지 않는 문명은 AI 글의 옳고 그름보다 매끄러움을 먼저 받아들인다. AI 탐지 도구나 표시 제도는 작성 주체를 알려줄 뿐 내용의 타당성을 판정하지 않는다. 작성 주체를 알아맞히는 기술보다 주장과 근거를 대조하는 독해가 판단을 좌우한다. 그러나 인쇄물과 시설만 유지해서는 이 능력이 보존되지 않는다. 긴 글을 천천히 읽고 직접 써보는 시간이 일상과 교육에서 사라지는 만큼, 사람은 AI의 결론을 검토할 기준도 함께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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